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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일반

'차클' 국제정치전문가 이근욱 전한 미국 실패 전쟁 20년史

이근욱 교수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분석했다. 지난 5일 방송된 JTBC '차이나는 클라스-질문 있습니다'에는 이근욱 교수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관해 설명했다. 2001년 9.11 테러 발생 후 미국은 곧바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테러의 배후였던 알카에다의 수장 빈 라덴을 아프가니스탄 내 탈레반 정권이 보호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빈 라덴 소탕과 테러 조직에 협조하는 탈레반 정권 축출을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폭격을 개시한 미국은 테러 발생 102일 만에 탈레반 정권을 제거했다. 순조롭게 탈레반 정권을 축출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내에 민주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왜 새로운 정부까지 세우려 했는지 묻는 학생의 말에 이근욱 교수는 "미국은 테러의 근거지 자체를 없애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정상적인 국가를 설립하려 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지난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완전한 철수와 동시에 탈레반 세력이 수도 카불을 장악, 전쟁 20년 만에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재집권하게 됐다. 세계 군사력 1위 국가인 미국이 20년이란 시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이근욱 교수는 "최고의 군사력으로도 제거할 수 없던 적이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바로 양귀비와 아편이다. 세계 아편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최대의 아편 생산국인 아프가니스탄. 미국의 침공 이후 탈레반은 아편으로 자금을 모아 재건에 성공,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서 거대한 마약 조직으로 거듭났다. 이를 방관하고 분석하지 못한 미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2년 뒤 미국은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테러 조직과 연계되어 있고,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등의 이유로 이라크를 침공했다. 침공 후 사담 후세인 독재 정권은 무너졌고, 그 자리에 친미 정권이 세워졌다. 기존의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을 필두로 한 소수의 수니파가 다수의 시아파를 억압하는 상황. 하지만 미국 침공 이후 정권을 잡은 시아파는 수니파를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하며 두 종파 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종파 분쟁 속에서 생존을 위해 수니파는 극단주의 테러 집단과 손을 잡게 됐다. 이는 곧 강력한 테러 집단인 IS의 탄생과 이어졌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20년의 역사를 함께 살펴본 이근욱 교수는 끝으로 "미국은 전혀 성격이 다른 두 전쟁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하나의 프레임으로 보았고, 이런 무지와 오만으로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치렀다.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군사력 사용에 대해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며 강연을 마쳤다. '차이나는 클라스-질문 있습니다'는 12일 유라시아를 탐험하는 고고학자 강인욱 교수와 함께 '피 튀기는 황금 유물 쟁탈전'이라는 주제로 '전쟁의 시대' 시리즈 세 번째 강연을 이어간다.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방송된다. 황소영 기자 hwang.soyoung@joongang.co.kr 2022.06.06 21:14
스포츠일반

기적의 아프간, 9·11의 악몽-9·11의 환호로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날이다. 아프가니스탄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순간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배후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총성과 포연은 아프가니스타의 일상이 됐다. 미국에 의해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종족 간의 갈등과 내전으로 신음하고 있다. 미군이 철수하면 다시 반군이 정부를 장악할 가능성도 크다.9.11테러 12주년이었던 지난 11일(현지 시간). 아프가니스탄은 모처럼 하나로 뭉쳤다. 집과 식당, 사무실은 물론, 마을 앞 공터까지 TV가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상대를 겨눴던 총도 잠시 내려놓았다. 네팔 카투만두에서 열린 남아시아축구연맹(SAFF) 결승전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의 결승전 때문이다. 2년 전 결승에서 아프가니스탄은 인도에 0-4로 대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인도는 남아시아연맹에서는 10번이나 정상을 밟은 지역의 맹주다. 그러나 이날은 아프가니스탄이 경기 내내 인도를 몰아붙이며 2-0으로 승리했다. 아프가니스탄이 국제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것은 1922년 아프간 축구협회 설립 후 처음이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아프가니스탄 전역은 축제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AP는 ‘증오가 아닌 축제를 위한 총탄이 공기를 갈랐다’라며 ‘수도 카불에는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거리로 나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경기 후 약 한 시간동안 축포 소리가 이어졌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1948년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한 아프가니스탄은 이해 열린 런던올림픽에 아시아 대표로 참가한 저력의 팀이다. 그러나 긴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1970년대 구소련의 침공을 받아 국제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한 탈레반 정권은 스포츠를 탄압했다. 경기장은 이슬람 율법을 배우는 공간으로 사용됐다. 2001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뒤 다시 축구가 시작됐다. 2003년 이 대회에서 3연패로 탈락했던 아프가니스탄은 딱 10년 만에 정상에 올라섰다.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의 젊은이들이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줬다"며 기뻐했다. 김민규 기자 gangaeto@joongang.co.kr 2013.09.13 09:50
축구

포화 견딘 아프가니스탄, 10년 만에 축구 되찾다

흔하디흔한 축구 국가대항전이 누군가에겐 10년 동안 겪지 못한 소중한 경험이다. 아프가니스탄은 21일(한국시간) 수도 카불의 아프가니스탄축구협회(AFF) 스타디움에서 파키스탄과 친선 경기를 갖고 3-0으로 승리했다. 2003년 투르크메니스탄을 1-0으로 꺾은 뒤 10년 만에 치른 홈경기였다.아프가니스탄은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 혼란기를 겪었다. 1954년 당시 아시아축구연맹(AFC) 창설 멤버일 정도로 인기가 높았던 아프간 축구는 1980년대부터 국제 무대에서 실종됐다. 탈레반 정권(1996~2001)은 유서깊은 가지 스타디움을 공개 처형 장소로 변질시켰다. 아프간 대표팀은 2002년부터 다시 세계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2000년대 들어 미국과 전쟁을 치르는 등 이어진 시련으로 홈경기를 가질 수 없었다. 종종 상대 국가 입국을 거부당해 원정 경기조차 치르기 힘들었다.아프간 땅에서 축구가 부활 조짐을 보인 건 지난해 9월부터였다. 8개팀으로 구성된 아프간 최초 프로 리그가 출범해 큰 화제를 모았다. 리얼리티 쇼를 통해 선수를 선발하는 등 떠들썩하게 시작된 프로 리그는, 아프간 사람들이 혼란 속에서도 스포츠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39위 아프간과 167위 파키스탄의 친선 경기는 두 국가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자는 취지로 성사됐다. 양국간 A매치는 36년 만에 처음이었다. 실력은 아프간이 한 수 위였다. 전반 20분 산자 아흐마디의 골로 앞서간 아프간은 전반 32분 하라쉬 아테피, 후반 26분 마루프 마흐무디가 추가골을 넣어 대승을 거뒀다. 새로 건설된 AFF 스타디움을 메운 관중 6000명은 열광적인 응원을 펼쳤다. BBC와 인터뷰를 가진 공무원 샤비르 아흐마드(27)는 "이 경기는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 이 경기가 양국 친선을 도모하려는 취지에서 열렸다 하더라도 아프간과 파키스탄은 라이벌"이라며 선수들 못지않은 투지를 불태웠다. 경기가 끝난 뒤에는 승리의 기쁨이 전국으로 퍼졌다. BBC는 "수십 년동안 전쟁과 빈곤에 고통받은 사람들이 광란에 가까운 축하를 나눴다"고 보도했다. AFF의 사예드 아가자다 사무총장은 "이 경기는 아프가니스탄이 힘든 시절을 끝내고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아프간 축구는 체계와 시설 등 여러 면에서 발전하고 있다. 축구가 더 성장할거라 믿는다"는 희망을 밝혔다. 파키스탄 축구협회도 이 경기가 양국 우호를 증진할 거라는 희망을 전했다. 김정용 기자 cohenwise@joongang.co.kr 2013.08.21 07:11
경제

두번째 넘는 국경 또다시 버스로

▲황량한 사막만이 있는 국경지대.물탄-밤(이란).한국사람은 밥을 먹어야 힘이 나는 모양이다. 다운이 삼부토건에 하루를 머물면서 한국식을 몇끼 먹곤 얼굴색이 달라졌다. 물론 하루만에 완전히 회복이 되진 못했지만 파키스탄을 넘으려면 아직 넘어야 할 고개가 많아 이곳에서 이틀을 쉰 것이 오히려 다행이기도 하다.물탄에 도착해 여행자들에게 악명높은 도시인 퀘타의 현지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경찰서에 들렀다. 가는 길을 설명하고 어떤 준비를 해야하는지 등의 정보를 얻으러 갔지만 경찰은 이 구간만큼은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고 한다. 페샤와르에 머무르는 동안 일어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도 그렇고. 얼마 전 카라치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로 정세가 불안하단 이유다. 혹여 우리가 경찰에 알리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간다고 해도 분명 도로에서 경찰이 보게 되면 차에 실어 이동시킬 것이란 거다. 퀘타는 반군과 정부군과의 충돌이 많은 지역이란 것은 알았지만 그 길목 역시 이리도 위험천만한 곳이라니 은근히 겁이 나면서도 왠지 금기시 된 곳을 가고 싶은 호기심도 생긴다.그렇지만 그런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우린 중국에서 이곳을 넘어왔을 때처럼 파키스탄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물탄에선 기차역으로 경찰차에 실려가 열 몇시간 동안이나 침대칸도 아닌 딱딱한 의자에 앉아 퀘타로 이동하고 다시 에어컨도 없고 게다가 창문도 열리지 않는 버스에 실려 국경으로 이동했다. ▲자헤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넘어와 유럽으로 가는 마약의 집결지 이기차역은 늘 온갖 사람들로 붐벼댄다. 기차 안도 물론 다를 바 없다.이 거리를 자전거로 이동한 것보다야 덜 힘들겠지만 열악한 이동수단으로 국경까지 가는 것도 웬만한 체력 아니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된 경험이었다.파키스탄의 국경도시인 타프탄은 몇몇 환전소를 빼곤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그저 국경일 뿐이다. 먼지가 폴폴 날리는 파키스탄 구역을 지나 이란에 들어서니 시원스레 뻥 뚫린 아스팔트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야~여기선 정말 라이딩 할 맛 좀 나겠다’하고 자전거를 손보는데 수속을 도와주던 이란 아저씨가 와서 하는 말이 ‘여기서 자전거 차고 가려고? 총 맞아 죽고 싶어? 좀 있으면 경찰이 올테니까 기다렸다가 같이 가’하는 게 아닌가.두 번째 넘는 국경도 결국 이렇게 지나는 건가. 잠시 후 경찰이 아닌 군인이 총까지 들고 나타나선 우리 일행이 탄 차를 호위한다. 국경에 근접한 도시인 자헤단에 도착했을 때 다른 경찰이 우리를 인수하곤 떠날 생각을 안한다. 한참을 길거리에서 기다리다보니 다른 경찰이 와서는 자헤단에 머물지 말고 버스편으로 밤으로 이동하란다. 거기서부턴 안전하다는데 말하는 도중 다운을 보며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한다. 왜 그런가 했더니 다운이 목에 걸고 있는 총알 목걸이가 문제였다. 소리를 지르며 당장 빼라며 자칫 한 대 칠 것 같은 험한 분위기다. ‘알았어…뺄게. 이거 그냥 모양이야. 화내지마…’하며 풀기도 힘든 목걸이줄을 결국 칼로 잘라내서야 경찰이 화를 멈췄다. 이란에 도착한 첫날부터 이게 뭐람.‘아무래도 안되겠다. 여기선 우리가 뭘 할 수 없겠어. 말 듣고 밤으로 이동하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강압적인 경찰과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는 말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밤(이란)=남영호 유라시아탐험대(www.eurasia2006.com) 2006.09.21 08:46
경제

오사마 빈 라덴 안 잡나. 못 잡나?

9.11테러로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WTC)에서만 2759명이 희생됐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6만 2000명이 넘는 희생자와 45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또 반군과 이라크 군인들까지 포함하면 총 18만명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베트남전쟁 이후 자연 재해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사상자를 불러온 9.11테러 5주년을 맞아 테러 주모자로 지목된 알 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이 새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7일 아랍계 위성방송 알 자지라 방송이 보도한 9·11테러 직전의 오사마 빈 라덴(오른쪽서 두 번째) 모습. AFP=연합뉴스또 이와 관련해 온갖 음모론적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9.11테러 음모론을 제기한 다큐멘터리 동영상 '루스 체인지'(본지 8월 14일자 23면 참조)가 지난달부터 인터넷에 확산되고 있는 점도 이와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7일엔 아랍계 위성방송 알 자지라 방송이 9·11테러를 준비하는 빈 라덴의 모습이 담긴 영상물을 처음으로 공개해 그때의 악몽을 되살리기도 했다. 과연 미국은 그를 못 잡는 건가, 안 잡는 건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 지대에 은신한 것으로 추정되는 빈 라덴은 익숙한 지형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고 활동하는 탓에 좀처럼 꼬리가 잡히지 않고 있다. 알 카에다가 도청이 가능한 전자 제품을 쓰지 않고 복잡한 인편으로 소식을 서로 전하는 방식도 그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미국이 그를 잡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 지대 주민들은 올 1월 알 카에다 2인자인 아이만 알 자와히리를 겨냥한 미사일 폭격 시 빈 라덴이 폭격 현장에서 불과 수 ㎞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에 앞서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 탈레반 정권 정복에 나선 2001년 11월에도 전쟁을 피해 달아난 빈 라덴을 토라 보라산에서 거의 붙잡을 뻔했다고 서방 국가와 아프가니스탄 등의 관리들은 말한다. ▲2001년 9월 11일 UA 175기가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의 남쪽 건물과 충돌하면서 불꽃과 검은 연기가 건물을 뒤덮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를 찾기 위해 미국·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은 군 10만 명을 비롯해 최첨단 도청 장치·위성 사진·무인 정찰기를 동원했고, 2500만달러(239억원)의 현상금까지 내걸었지만 아직 이 엄청난 현상금을 타간 사람은 없다. 빈 라덴은 9.11테러 당시에 비해 조직에 대해 직접적 통제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립된 상태지만 지난달 런던 공항 테러 모의 사건과 같은 국제적 테러의 배후로 알 카에다가 꼽힐 만큼 그의 조직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에 비해 빈 라덴을 반드시 잡겠다는 미국의 희망은 점점 식어 가는 모습이다. 미국 당국이 가장 최근 그의 행방에 대해 언급한 것은 벌써 2년 전이다. 워싱턴포스트(WP) 인터넷판은 10일자에서 미국 및 파키스탄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빈 라덴의 체포나 살해를 임무를 부여받은 미국 특수부대원들이 2년 이상 신뢰할 만한 단서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도 빈 라덴 체포를 전담하는 조직을 이미 해체했고, 그를 잡는데만 집중했던 미군도 아프가니스탄 재건과 탈레반 잔당 소탕 등 다른 임무에 힘을 쏟고 있다. 과연 그를 잡을 수 없는 걸까? 파키스탄 국경에 배치된 한 미군 하사관의 말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 부대원들은 산속에서 마치 유령을 쫓는 것 같다."강인형 기자 2006.09.1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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